百의 그림자 by 설안

  촛불 '사건' 이후, 문학계에서는 '문학과 정치'가 새삼 화두로 떠올랐다. 이후 용산참사가 이어지고, 이 시점에서 문학이란 무엇인가, 혹은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등등의 질문들이 여기저기서 솟구쳤다. 이에 대해 평론가들은 평론가대로, 작가들은 작가대로 그 나름대로의 답을 평론의 형식으로, 작품의 형식으로 제출했다. (2010년의 하나의 사건이 아닐까 싶다.) 
 
  작품의 경우, (나는 작품의 형식이 더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과도한 정치의식이 드러나 2010년이 어느정도 축적해온 문학 상황에서 퇴행한 것처럼 보이거나, 너무나 문학적이어서 추상적인 경우를 보면서,'이건 아니다, 다른 것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통해 즉, 反을 통해 요구되는 合을 내 나름대로 정립할 수 있었다. 
   
  황정은의 <<百의 그림자>>(민음사, 2010)가 일부에서 환영을 받은 것인 이런 맥락에서가 아닌가 싶다. 이 소설은 용산 전자상가철거라는 정치적 사건에 대해서 "그림자"라는 문학적 장치를 통해 구현하고 있다. 그래서 일부에선 이 소설이 왜 그렇게 환영을 받는 것인지, 어리둥절하기도 한 것 같다. 신형철은 이 소설에 대해,  "고맙다. 이 소설이 나온 것이 그냥 고맙다는 생각이 든다"라고 말했는데, 이 또한 이 소설이 시의성 때문이 아닐까 싶다. 
 
   물론 이 소설이 시의성 때문에 유효하다는 말은 아니다. 시기적절한 때에, 작가가 문제의식을 자신만의 소설답게 잘 녹여냈으며, 적절한 문제의식이 드러나 있다. 이 소설은 사십 년이 된 전자상가가 어떻게 폭력적인 방식에 의해 철거되는지를, 우리가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언어란 얼마나 폭력적인지를 보여줌으로써, 개별적인 삶을 살려내고, 우리가 그에 대해 갖춰야 할 윤리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 소설은 전자상가에 살아온 사람들 각각의(百) 그림자를 통해 그들의 불행을 그려내되, 작가가 말한 "따뜻함"("다만 따뜻한 것을 동원하고 싶었다"-<작가의 말>)을 통한 연대를 제시하고 있다. 누구나 자신말의 그림자(불행)를 가지고 산다. 그 그림자는 각 개인의 삶이 다르듯, 모두 다르다. 이 그림자는 주인의 일부분으로 속해있는 일부분일 뿐이다.(불행은 우리의 삶의 일부분이듯) 그런데 불행이 증폭되는 순간, 이 그림자는 주인을 떠나거나 주인의 발에서 솟구치며, 심지어 말을 하기까지 한다. 그런데 이 그림자를 따라갔단 사람들에게 주위 사람들은 말한다. "따라가지 말라고." 개별자들이 그림자를 따라가게 되는 이유는 각기 다르지만,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바로 이것이다. '그림자'에 지배받는 상황이 아니라, 그 '그림자'에게 지배당하지 말라고 말해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 그것은 이 이야기의 주인공격인 은교와 무재의 사랑에서도 볼 수도 있다. 사랑하는 이가 그림자를 따라가지 않도록 잡아주는 것, 내 이웃이 그림자를 따라가지 않도록 잡아주는 것. 그것이 일종의 "따뜻함"이며, 희망이지 않을까. 몇 십년을 자리잡은 터전에서 쫓겨날 운명에 처해있는 이들이(이들의 사랑이) 아프지만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 아닐까 싶다.





  
 
 


슈거푸시 by 설안

이명랑하면 단연 『삼오식당』(시공사, 2002)이 등식처럼 떠오른다. 이명랑은『삼오식당』에서 엄마인 그녀들의 악다구니같은 삶을 여실없이 보여주었다. 실제 시장통에서 자란 작가의 생생한 경험이 녹아나면서, 여성성과 여성의 욕망을 그려내던 전 세대 여성작가들과 확연히 구분되었고 돋보였다. 『슈거푸시』(작가정신, 2005)는 이제 막 엄마가 된 스물일곱살 여성의 억압된 욕망을 그려낸다. 이명랑다운 입담은 여전히 빠른 속도로 소설을 읽히게 하지만 그뿐, 이 소설에서는 오히려 독이 된 것 같다. 

여왕벌처럼 군림하는 엄마와 군인인 남편에게 짓눌려 살던 소희가 백화점 문화센터에서 "라틴댄스"를 몰래 배우게 된 것이 이 소설의 유일한 사건이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을 억압당했던 소희는 "아름다움"을 예찬하는 라틴댄스강사와 그 추종자인 수강생들을 만난다. 라틴댄스 강습이 끝나는 동안까지 소희는 육십칠킬로그램의 몸매에 츄리닝을 벗어나지 못하고, 엄마와 남편 또한 소희가 라틴댄스를 배웠단 사실조차 모른 채 소설은 끝난다.

물론 전복이 일어나야 좋은 소설인 것은 아니다. 소희는 여전히 남편에게 받은 180만원 안에서 어떻게든 살림을 꾸려가야 할 수밖에 없고, 친엄마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인 엄마의 힐난을 들어가며 살 것이다. 그 속에서 소희는 "뒤꿈치로 음흉스럽게! 발끝으로 조심스럽게!바닥에 볼이 닿을 때마다 은밀하게!", 담배를 몰래 피워가며 그렇게 사는 것이 현실일테다. 그런데 문제는 가부장적 가족 내에서 억압된 욕망을 드러내는데 있어서 인물설정이 개별적인 한 가족의 사례에서 벗어나지 못했단 것이다. 엄마는 시종일관 변하지 않는 성격을 갖고 있고, 왜 그런지조차 여왕벌에 비유에서 설명할 뿐 설득력이 약하다. 남편 또한 군인이란 직업을 선택함으로써, 권위적인 집단에 속한 한 개인의 가부장적 성격으로 축소된다. 이명랑의 장기인 직설적인 내뱉음 또한, 이 작품에서는 상황을 설명해주는 내레이션이 되버린다.


문학과 사회 2010년 여름호 소설 by 설안

정찬, <세이렌의 노래>
김성중, <게발 선인장>
구병모, <마치 …… 같은 이야기>
(선택, 젊은 소설) 이은선, <카펫>  



<세이렌의 노래>는 용산 참사를 정찬 특유의 글쓰기로 그려내고 있다. 그리스 신화의 트로이 목마 일화를 빌어와 용산사태를 알레고리적으로 그려낸다. 혼몽 속에서 '피의 노래'를 듣고 깬 영웅 오디세우스의 목소리를 빌어, 용산참사가 재구성된다. 용산4구역에서 도시와 푸른 망루의 사람들이 대립하고, 도시가 만든 트로이의 목마가 푸른 망루의 사람들을 공격한다.(고 오디세우스는 본다) 용산 사태의 사실 자체의 기록이 오디세우스의 목소리와 인식을 통해 전달되면서, 사건과 일정한 거리가 확보되고 보편적인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도시, 푸른 망루, 트로이 목마, 세이렌의 노래, 푸른 망루라는 알레고리는 단순하게 엮이되, 낮은 수준으로 떨어지지도 않고 있다.(역시 중견작가다운 구성력이 보인다.) 트로이 목마 이야기를 우리는 그리스의 승리로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 오디세우스는 트로이목마를 통한 공격을 "학살"이라고 부르고 있다. 또한, 도시가 트로이 목마를 통해 '피의 노래'를, 용산 사람들이 진실을 말하는 세이렌의 노래를 부르고 있다고 하는 점에서 작가의 지향점이 드러난다. 오디세우스를 내세움으로써 얻는 보편성의 획득은 높이 쳐줄만 하지만, 결말의 "푸른 집으로 귀가하는 꿈"(98)이란 표현은 너무 문학적이란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2009년 등단한 신인인 구병모의 <마치 …… 같은 이야기> 또한 알레고리의 형식으로 이명박정권을 우회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3년전의 내전 이후 황폐화된 S시를 찾아가려던 시인은 도시의 초입에 해당하는 '마치'라는 간판이 적힌 술집에 들어선다. 이곳에서 S시에서 합리적인 일처리를 가능하게 하기 위해 비유법을 금지시켰다는 사실을 듣게 된다. 당연하게 연극, 공연, 도서관 같은 문화 장소가 사라지게 되고 드라마나 코미디가 사라지고, 그 자리를 건설업체, 은행, 다큐멘터리가 채우게 된다. 그런데 이것은 표면적 이유이고, 진짜 이유는 시장의 별명이 어느 순간 "미무르"란 혐오스런 동물로 알려지고, "미무르"하면 곧 시장을 가리키는 말이 되면서 그 말 자체를 못쓰게 막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소설의 설정은 현재 벌어지고 있는 사건들을 바로 떠오르게 하면서 일종의 언어 유희를 자아낸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다만 유희로 끝나지 않고, "언어의 힘"에 대한 사유를 보여주고 있단 점이다.(따라서, 주인공을 시인으로 내세운 것은 당연하다.)  

<게발 선인장>은 종교를 넘어선 믿음의 문제를 건드리고 있다. 사이비 종교인 일주교는 한 명의 교주와 한 명의 교도, 한명의 배교자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인물은 한 명의 교도인 할머니이다. 젊은 나이에 병이 들어 산속에서 수련을 하다가 신을 만난 교주는 이미 자신이 '신'이 된 것에 대한 회의를 품은 지 오래이고, 세속적인 생활을 영위한다.ㅁ 사실 외부에서 보기에 갈데없는 노인인 교주가 할머니에 빌붙어 사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반면, 할머니는 어리석을 정도로 교주를 떠받들며 선행을 실천한다. 할머니는 이러한 교주가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도록 설득한다. 신의 자리에서 내려오고자 하는 교주는 교도인 할머니 때문에 그렇지 못한다. 한편, 이 동네에 교회를 연 목사는 분양권 때문인 것으로 밝혀지고, 교주와 배교자는 재건축 대상인 할머니 집의 분양권을 빼돌리고 밤도망을 간다. 누가봐도 미련해보이는 할머니는  "품위 있게, 노년 궁핍의 삶"으로 들어갔다. 신인임에도 불구하고, 무겁고 철학적인 주제를 삶의 문제로 녹여낸 작품이었다. 

한국작가가 '한국'을 넘어선 소설을 쓸 때 그것은 여행기 정도로 떨어지기 쉽상이다. 문제의식이 사라지고 이국적인 감상을 전달해줄 뿐 독자에게 어떤 자극도 되지 못한다. 이러한 한계를 넘어설 때 진정으로 '한국'을 넘어선 열린 소설이 될 터이다. 이은선의 <카펫>은 아랄해의 재앙을 지금-여기로 불러낸다. 한국의 생태조사팀으로 갔다가 낙오된 여자와 오염된 물로 목이 붓는 병에 걸린 슈흐랏의 만남은 한국을 넘어선 문제의식을 보여준다. 

이번 문사 소설들은 현실의 문제를 건드리되, 각자의 방법으로 그려내고 있다. 자칫하면 현실 비판만 남을 수 있는 문제들이 언어의 힘, 사유의 힘과 만나 문학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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