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둥시(텐다이린), Mr. 후회남, 은행나무, 2008.

생소한 체험. 그것이 독서 행위에서도 가능하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한 책이다. 중국, 특히 현대 중국이란 낯선 시,공간이란 문외한인 나에겐 흥미롭게 다가왔던 것을 고백해야겠다. 그리고 새삼, 역사적 사실과 다른 소설의 가능성에 대해 생각해본 시간이었다고나 할까. <Mr. 후회남>은 개성 강한 캐릭터를 통해 그 남자의 후회가득한 일생을 다루고 있지만, 그 배경에는 중국 문화대혁명기의 격동의 시기가 자리잡고 있다. 하지만 둥시는 그것을 전면에 내세우지 않고, 애써 비판하지 않는다. 그저 한 후회남의 일대기를 우스꽝스럽게 그리고 있을 뿐이다.   
둥시(東西)라는 필명은 하찮은 것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라고 한다. 그가 그리고 있는 주인공 광셴도 하찮은 인물이며, 속터질 정도로 답답하다. 그가 처음 아버지와 이웃 자오산허의 동침 현장을 엄마에게 실토하고 자오완넨에게 고자질하게 되는 것은 어린 아이이기 때문이라고 넘어갈 수 있다. 하지만, 그는 그러한 후회할 일을 계속해서 벌이고 주위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다가, 결국 강간으로 오인받아 8년형을 선고받는다. 사소한 말실수와 순간의 결정들은 그를 결국 자신을 좋아하는 여자가 있는데도 결혼도 하지 못하고, 결혼 사기를 당하여 이혼도 못하는 상황에 빠지게 한다. 문화대혁명이 끝나고나서도 10년을 감옥에서 공백기로 보낸 광셴은 변화된 세상에서 적응하지 못하며, 국가 소유가 되었던 창고를 되돌려 받게 되었어도 그것을 활용하지 못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성'에 대한 문제이다. 사실, 이 후회남의 후회는 '성'과 뗄라야 뗄 수 없다. 아니 소설 전체가 '성'에 대한 후회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그런데 앞서 어린 광셴이, 아버지와 자호산허의 동침을 자오완녠에게 알리자, 아버지는 홍위병에게 끌려간다. '성'이란 것이 국가에 의해 억압되고 배제되었기 때문이다. 첫 장면에서 광셴이 최초의 성지식을 개한테 배웠다고 언급하는 부분은 소설 전체에 대한 알레고리로 보인다. 개의 짝짓기는 본성적인 것이지만, 이것은 당시 정부의 대표라 할 수 있는 자오완녠에 의해 '퇴폐적이고 저급한 취미'로 부정해야 할 대상이 된다. 결국 개들은 몽둥이에 맞아 죽게 되는데, 이런 성에 대한 억압은 이후, 광셴의 행위에 일종의 억압기제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끝까지 극복하지 못한다. 국가와 사회의 폭력성은 이렇게 성에 대한 한 남자의 인식을 불구화한다. 
여전히 답답한 것은, 이 후회록이 한 남자의 성장담이라고 할 때, 이 남자가 전혀 성장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보통 인간은 후회를 통해 자기 자신을 성장시켜 나간다. 그러나 광셴의 후회는 같은 차원에서 무한히 반복될 뿐이다. 이것이 작가의 중국 현실에 대한 인식인지, 중국의 역사적 사실을 배경르로 성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면서도 비판의 날을 세우지 않는 작가의 정체성은 무엇인지에 대한 의문이 들며, 나아가 중국소설의 현재 위치에 대한 궁금증이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다.
   

by 설안 | 2009/04/28 00:23 | 트랙백 | 덧글(0)

신념

내 작은 원 안에 갇혀 살다가, 잠시 원 밖을 내다보았다.
그들이 있다. 자신의 신념에 따라 생각하고 실천하는.

그들의 원의 크기가 내겐 막막해 보인다. 무한하고, 계속해서 늘어났다가 수축하지만 팽팽한 원.
나는 내 작은 원 안에서의 소소한 일상조차가 힘에 부친다. 그 원을 조금 늘이는 것은 내겐 대단한 용기를 필요로 한다.

신념. 나에게 신념이란 게 있기나 할까.
지금 이 글을 쓰는 것 조차게 내겐 큰 용기이다. 나 자신에 칼을 들이대는.

by 설안 | 2009/01/19 10:22 | 일기 그리고.. | 트랙백 | 덧글(0)

[문학비평세미나발제]전성태, 이미테이션

 전성태, 이미테이션, 문학과 사회, 2009년 겨울호.


  소설의 시작은 평범하다. 게리라는 혼혈인(?)은 미국 로컬 스쿨을 그대로 옮긴 학원에서 원어민 강사로 일한다. 더 많은 학생을 유치하기 위하여, 원장과 미예, 게리는 하나의 연극을 벌인다. 초등학교 때부터 원어민 강사에게 가르치려고 하고, 카드 결제를 거부하는 학원 등의 사교육 시장의 모습을 그려냈다는 것은 최근 이슈화되고 있는 문제의 형상화라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갖지는 않는다.

  문제적인 것은 이 게리라는 인물의 정체성이다. 게리는 한국인이다. 한국인인데, 혼혈인의 외모를 가진 한국인이다. 그의 부모는 “오리지널 한국인”인데도 불구하고, 그는 “다국적인 외모”를 갖고 있다. 단일민족국가를 표방하는 한국에서, 이 외모는 그의 소년시대를 뿌리 찾기에 열중하게 하고, 오해로 얼룩지게 했다. 그는 국사 시간에 ‘단일민족국가’라는 말을 읽을 수 없었다. 그의 행동을 반항으로 오해한 국사 선생은 그를 벌주고 반성문을 쓰게 한다. 그 과정에서 국사선생은 그를 혼혈이라 오해하고 혼혈이면 더 독심을 품고 잘해야 하며, 민족은 핏줄이 아니라 가슴에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민족은 핏줄이 아니라 가슴에 있다는 것은 민족이란 이름으로 비한국인을 한국인으로 포섭하는 논리나 다름없다. 그런데 이 포섭에는 ‘너는 한국인이 아니다’라는 배제의 논리가 포함되어 있다. 게리는 국사 수업의 사건 이후, 혼혈인으로 살아가기로 마음먹는다. 한국인이지만, 외모 때문에 혼혈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다. 이제 그는 자신의 ‘원판’을 게리 워커 존슨이라는 혼혈인으로 삼고, 그를 모방 ․ 모조한다. 란셀 백이 이미테이션과 오리지널이 구분 안 가듯, 게리 워커 존슨을 모방한 후 그는 게리의 삶을 살고 그것이 그의 삶을 더 편하게 만든다.

  이렇게 그를 혼혈인으로 살아가게 만든 배제의 원리는 국방의 의무에 가서는 작동하지 않는다. 외모로 인해 군대에서 고생할 것을 배려한 혼혈인 병역복무면제 조항은 외모만 혼혈인 그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그는 ‘오리지널 혼혈인’이 아닌 ‘이미테이션 혼혈인’인 것이다. 그는 ‘오리지널 한국인’도 아니며 ‘오리지널 혼혈인’도 아닌 이중의 ‘이미테이션’적 존재로 이중의 배제를 받는다.

 이 이중의 배제에서 그는 ‘이미테이션’의 삶을 선택한다. 이미테이션 백을 오리지널인 것처럼 매고 다니는 세상이다. 아니 오리지널이 이미테이션일 수 있단 심증이 있어도 묵인된다. 게리도 서울을 모방한 ‘인공의 도시’에서 이미테이션의 삶을 산다. 그것이 그의 자리이다.   원장은 게리가 한국인이라는 것을 알지만 자신의 이익을 위해 그를 원어민 강사로 둔갑시키고 모종의 합의를 본다. 게리의 짝퉁 삶은 그 자신의 선택이지만 자본주의와 민족주의가 결합한 국가의 포섭과 배제의 논리 안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 이것이 이 소설이 근본적으로 던지는 물음이 아닐까.

 

by 설안 | 2009/01/18 16:57 | 순간 혹은 영원한 | 트랙백 | 덧글(0)

[책]게공선




# 고바야시 다키지, 양희진 역, 게공선, 문파랑, 2008.

"게공선은 '공장선'으로 '선박'이 아니었다.
그래서 항해법이 적용되지 않는다.
게다가 배가 아닌 순수한 '공장'이었다.
하지만 공장법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


지금 일본에서는 '게 공선 붐'이란 말이 회자될 정도로, 1929년작인 이 작품이 주목을 받고 있다고 한다. (관련 기사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040472) 88만원 세대, 비정규직 등이란 말이 일상적인 말이 된 한국에서도 이 소설이 주목되고 있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닐 것이다. 한국의 계급주의 소설들이 이전 시대의 유물로 취급받고 있는 상황과 비교해보면, 이 소설이 붐을 일으키게 된 요인은 차치하고(20년대와 다를 바 없는 혹은 더 암담한 이 현실!) 80년을 훌쩍 뛰어넘는 이슈화는 이 소설이 현재적으로 그 생명력을 발휘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반대로 이 상황은 현대 일본 소설의 빈곤함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다키지는 캄차카 영해에서 게를 잡아 통조림을 만드는 '게 공선'의 노동자의 비참한 생활상과 회사의 이익을 위해 노동자들을 인간이하 취급을 하는 감독의 행태를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어업노동자와 잡일꾼, 선원들은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지 못하는 상황 하에서 분노하고, 한 어업 노동자가 러시아 가족을 만나 자신들의 노동의 부조리성을 깨닫는 과정에서 '우리'가 되어 이 상황을 전복하고자 반항한다. 그러나 이 파업은 대표 아홉 명이 구축함에 호송되는 것으로 마감된다. 그들은 이 파업을 통해 군함으로 대표되는 국가란 것이 국민의 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들은 국가가 국민의 편이라고 믿었지만, 국가는 '부자들의 압잡이'일 뿐이다. 파업이 실패한 데서 얻은 이것은 큰 교훈이 된다. 국가는 국민을 포섭하려고 하지만 그것은 국가의 이익에 한해서이다. 이익에 반할 때 국가는 얼마든지 국민을 배제하고 억압한다. 이러한 의식적 성장을 한 그들의 이후 파업은 '덧붙이는 말'에 의해 성공하였음을 말해주며, 이러한 노동 운동이 퍼짐을 말해주며 끝난다. 이러한 결말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전형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 소설이 단지 역사 속에 묻히지 않고, 21세기에 살아난다는 것은 무엇을 시사하는가. 이 소설의 특장은 소재에 있는 것같다. 항해법도, 공장법의 적용도 받지 않는 사각지대의 게 공선. 1920년대 말 내지에서는 노동자들의 힘이 커지는 추세였지만, 여전히 게 공선은 법의 바깥에 있다. 80년 후의 지금은 어떤가. 경제적 성장을 하고, 노동자들이 이전보다 법적 권리를 획득한 듯 보이지만, 여전히 사각지대는 존재한다. 아니 오히려 더 교묘한 방식으로 작동하면서, 합리적인 체 한다.

일본에서 '게 공선 붐'이 일어남에 따라, 한국에서도 이 책이 주목받고 있다. 한국에서의 주목은 상업적 논리가 더 작용하는 듯하다. 가벼운 현대 일본 소설이 판을 치는 시장에서 묵직한 '게 공선'은 현대 일본 소설에 질린 독자들에게 자극적인 것일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묵직함을 80년대 전의 소설에서 찾아야 한다는 현실은 암울하다. 현대 일본의 작가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이 물음은 칙릿화되어가는 한국소설에도 귀감이 될 만한 일이다. 한편으론, 사소설화되어가고 있는 경향 속에서도, 지금-여기에 문제제기하고 있는 한국 작가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한국소설을 사랑하는 독자로서 큰 위안이 된다. 또, 2008년 이후 일군의 작가들이 사교육, 비정규직, 남북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미학적 형상화까지 이루기 위해 분투하는 모습에 격려의 박수를 보내주고 싶다.
by 설안 | 2009/01/10 20:26 | 순간 혹은 영원한 | 트랙백 | 덧글(1)

2009년 1월

읽을 예정 / 읽는 중 / 읽음


#.

박민규, 카스테라, 문학동네, 2005.

박민규, 지구영웅전설, 문학동네, 2003.

성석제, 농담하는 카메라, 문학동네, 2008.

고바야시 다키지, 양희진 역, 게공선, 문파랑, 2008.  



#.  
 질 들뢰즈 펠릭스 가타리, 윤정임 이정임 역, 철학이란 무엇인가, 현대미학사, 1995. (세미나) 


#.
염상섭, 사랑과 죄 (연구)


by 설안 | 2009/01/02 21:44 | 책읽기 기록장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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