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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어슐러 K. 르귄 지음, 서정록 옮김, 어둠의 왼손, 시공사, 1995.

초등학교 6학년 때,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책대여점은 새로운 세계로 통하는 통로였다. 그 한켠에는 SF소설이나 판타지 소설들이 자리잡고 있었고, SF소설이나 판타지 소설은 다른 세계를 그야말로 '판타스틱'하게 그려낸 것, 즉 비현실적인 "멋진 세계"라고 생각했다.

SF소설이 내 관심사도 아니었거니와, 문학을 하겠다고 마음을 먹은 후에는 거의 본격소설만 읽는 편향적인 독서를 했기 때문에, SF소설은 10여년 간 내 의식을 떠나있었다. 굳이 SF소설을 읽지 않아도, 영상매체의 발달로 그것은 언제나 접할 수 있는 것이었고, 특별하게 느껴지지도 않을 만큼, 일반화(!)되어 있었다. 그런데 최근 본격소설에서 SF적 판타지적 요소가 심심치 않게 발견되고, 이것은 하나의 현상으로 자리잡았으며, 한쪽에서는 반기는 소리가 한쪽에서는 우려의 소리가 들리고 있다. 

여하튼, 이러한 와중에 <<어둠의 왼손>>을 읽게 되었다. 내가 위에 길게 사적인 이야기와 SF에 대한 내 얕은 인식을 늘어놓은 것은 이 책이 SF에 대한 내 인식을 흔들어놓았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기 전에 난 정말이지 심심풀이 영화 한편 본다는 가벼운 생각으로 몇 시간 만에 "재밌게" 읽어야지란 생각을 했더랬다. 영화가 그렇듯이, 사건의 스펙타클한 전개를 기대했던 나는 이게 SF냐란 볼 맨 소리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곧 이것이 내 SF에 대한 이해의 한계이며, 대부분 사람들의 편협한 생각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의 말을 먼저 들어보자. 르 귄은 "과학소설은 예언을 하는 것이 아니라 기술하는 것이다."(8)라고 말하고 있다. 소설가는 예언가처럼 "~게 될 것이다"라고 예언하는 사람이 아니다. 다만 특유의 상상력으로 거짓말(허구)를 기술할 뿐이다. 르 귄이 남녀 성의 구별이 없는 게센인에 대해 그릴 때, 그녀는 "정교한 상황적 거짓말을 만들어 내서, 심리적 실재의 어떤 측면을 기술할 뿐이다."(11) 
이러한 글쓰기에 대해 작가 스스로 "사고실험"이라고 명명하는데, 그것은 "미래를 예언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의 세계 즉 현재의 세계를 기술하는 것이다."(8)

여기서 주목할 것은 현재의 세계를 기술한다는 것이다. 물론 현재의 세계에 에큐멘도, 남녀동성도 존재하지 않는다.(아니 어딘가에 존재할 수도 있다!) 이 소설에 기술되어 있는 시공간, 인물, 사건은 비현실적이다. 빛의 전달자인 엔보이가 게센에 가서 이들과 동맹을 맺기 위해 온갖 음모 속에서 모험을 거쳐 동맹을 성취한다는 사건은 정말 말도 안되는 이야기로 다가올 수 있다. 게다가 그저 재미로만 읽기엔 이 책은 사변적이다. 사건보다는 빛의 전달자인 '겐리 아이'와 '에스트라벤'을 1인칭으로 내세워 교차하여 그들의 내면_사유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의 묘미는 이들이 사고하는 방식이 우리가 지금 국가, 성이라고 규정해놓은 것들을 미묘하게 비껴나간다는 점이다. 특히 이곳에서 새해가 늘 원년이며, 과거나 미래가 원년을 기준으로 새로 시작한다는 것은 과거에서 미래라는 진보를 전제로 하는 근대의 시간관을 전복시킨다. 즉, 이 소설은 거짓말을 늘어놓음으로서 '여기-지금'(근대 세계)을 사유하게 한다. 서로 다른 종족인 '겐리 아이'와 '에스트라벤'이 마음의 언어로 소통하고, 서로를 사랑하고 이해하게 된다는 것은 이 현재 세계에 대한 희망으로도 읽힌다.(이 책이 쓰인 시점이 냉전시대였음을 생각하라!) 

장르 소설에 대한 지식이 없는 나로서는, 이 책을 통해 새로운 인식을 하게 되었다는 것으로 만족한다. 조금더 궁금한 것은 1960년의 SF와 현재의 SF의 격차이다. 아직까지는 비현실 세계를 그린 것이라고 생각했던 나의 SF에 대한 인식이 나만의 편견에서 비롯한 것만은 아닐 거란 생각이 강해서이다. SF가 편협하게 혹은 독자들의 구미에 맞게 변한 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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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설안 | 2009/08/13 22:39 | 순간 혹은 영원한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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